금감원이야기

2019 여섯번째 이야기

vol.110

Prologue

작은 도시 이야기

물길과 뭍길의 고장 충주

글 최경숙(건축가, 여행작가)  

중원이라 불리며 물길과 뭍길을 모두 끼고 있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신경을 곤두세워 탐한, 충주. 자연은 제 몫대로 살면서 역사의 흔적을 늘 버리지 않고 숨겨놓는다. 고대의 서사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 남한강부터 가장 오래된 옛길 하늘재까지 다양한 시대의 켜를 찾아 충주를 유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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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덮인 탄금호를 떠오르는 태양이 환상적인 빛깔로 물들이고 있다. (사진 제공: 충주시)

고대의 서사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 남한강에 툭 버티고 있는 충주 비내섬

1500년 서사의 길목, 남한강

충주 비내섬, 탄금대

다 타버린 듯 앙상해진 식물들 사이로, 따스한 백발을 띠며 흔들리는 억새들. 땅에서보다 더 모질게 부는 강바람은 내 눈 속까지 씻어 잠을 몰아낸다. 고대의 서사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 남한강에 서 있다. 남한강에 이르러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충주 비내섬이다. 포장도로 없이 때로는 군사훈련도 펼쳐지는 곳이다. 면적 99만 2000㎡로 꽤 큰 섬이지만 사람을 위한 편의 시설은 없다. 억새가 자비 없는 강바람에 출렁이며 파도를 만든다. 충주의 옛 이름은 중원(中原)이다. 국토의 중심부로 오랫동안 불렸는데 고구려 때는 국원성(國原成), 통일신라 때는 중원경(中原京)이 설치되는 등 입지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충주가 철 생산지인데다 계립령, 죽령 등 육로와 남한강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삼국이 신경을 곤두세워 이 지역을 탐했고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점령했다. 마지막으로 중원을 점령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다.
멀리서 남한강을 조망하기 위해 탄금대(명승 제42호)로 향했다. 해발108m 정도의 야트막한 산에 남한강을 향해 열려있는 탄금대. 가야 사람,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달천과 남한강의 합수머리에 위치해 남한강의 절경을 볼 수 있다. 대가야는 가야금을 처음 만든 고대국가로 문화수준이 높았다. 대가야의 가실왕은 가야국의 연맹과 왕권 강화를 위해 우륵에게 연주곡 12곡을 짓게 했다. 신라와 합병후 그의 진가를 알아본 진흥왕은 그에게 계고, 법주, 만덕 등 신라인에게 음악을 전수하게 한다. 신라는 대가야의 음악을 수용했고 우륵의 음악은 신라의 국가 대악(大樂)으로 남게 된다. 늙은 강은 더디 흐르곤 하는데, 전날 강수량이 많았는지 물살이 제법 느껴진다. 남한강은 장장 375km를 흘러 남양주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해 새 흐름으로 환생한다. 합쳐진 강은 또 수선스런 역사의 서사를 담고 바다로 흡수된다. 그들은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살아서 제 소리를 내며 산다. 우륵의 가야금 소리는 내 시야를 넘어 저 강 따라, 저 산 따라 울렸으리라. 물길에서 뭍길로 또 다른 가야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우리나라 유일한 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는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광개토대왕이 세웠다는 설도 최근 제기되고 있다.

포장도로도 편의시설도 없이 갈대숲만 무성한 비내섬

남한강이 휘돌아 가는 물가, 오석리의 밤을 무지개다리의 화려한 조명이 물들이고 있다.

중원에서 맞닥뜨린 고대의 흔적들

중원 고구려비, 누암리 고분군, 탑평리 칠층석탑, 장미산성

멀리, 봉긋 솟아 옹기종기 모인 묘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담한 골에 모인 그 누군가의 가족묘처럼, 묘들은 양지바른 땅에 뿌리내렸다. 언덕에 줄지어 조성한 덕에 모든 묘가 햇살을 차별 없이 누린다. 언덕 끝에 올라 보니 고분 좌우 풍성한 숲이 낮은 산맥과 이어져 아늑한 풍경을 만든다. 그 앞 시골 농부의 밭고랑이 줄지어 보인다. 고분군은 밭 매고 농사짓는 생활터전 한 가운데 있다. 매운 바람이 고분을 타고 올라와 손이 시리다. 햇살은 가을인데 바람은 설익은 겨울 같다. 누암리 고분군(사적 제463호)을 가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까닭은 발굴된 생활도구들 때문이다. 금동 장신구도 함께 출토되어 나름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의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강점기 때 거의 대부분 도굴되어 구체적으로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크기로 신분을 가늠할 수밖에 없다. 약 1.5km 안에 고분 230여 기가 모여 있고 이중 일부를 볼 수 있다. 초록빛 사라진 고분의 색이 논에도 번져 하나의 땅처럼 이어져 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경주의 귀족과 가야 사람 일부를 충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통일 후 8세기에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을 세웠다. 중앙탑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통일신라 때 남쪽 끝과 북쪽 끝을 같이 출발한 사람이 이곳에서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 유일한 칠층석탑으로, 위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져 우뚝 솟아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앞으로 석등의 하대석이 남아 있는데 석탑 주변은 옛 절터로 1970년 초 대홍수로 주변을 복구하면서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 고구려 와당을 닮은 유물로 고구려 절이라 추측하기도 하고 백제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지었다는 설도 빼놓을 수 없다. 칠층석탑은 주인을 찾지 못한 미지의 절터 안에서 홀로 우뚝 솟아 남한강 서사의 등대로 서있다. 또 하나의 등대,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의 운명도 파란만장하다. 1979년 제보로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이름 없는 비석을 찾았고 고려대왕, 고구려 관직 이름과 고구려가 신라를 부르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세워졌다고 알려진 중원고구려비는 오랜 세월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4면에 모두 글을 새겨 놨고 형태는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 전시된 실물을 보면 죽다 살아난 비장함이 느껴진다. 한때 마을 대장간의 기둥으로도 사용되었던 고구려비가 깨지지 않고 오롯이 제 몸을 지켜내 다행이다. 1500년 동안 깊은 잠에서 누군가 깨워주길 기다리던 그 묵직함 덕에 지금 우리 앞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세운 중앙탑이라 알려진 탑평리 7층 석탑. 두 석물 모두 중원을 장악한 고구려와 신라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최초의 고갯길에서 고구려 땅을 바라보다

하늘재, 미륵대원, 사자빈신사지석탑

백두대간에서 가장 순한 길이자 가장 오래된 옛길, 하늘재를 걷기로 했다. 한적한 소나무길, 작은 골과 흙길은 낙엽으로 덮여 경계가 허물어졌다. 아래쪽 잎은 이미 다 떨어졌고 하늘 가까이에만 잎이 남아 소나무들이 아름드리 천막을 두른다. 숲속인데도 이파리 떨어진 가지 틈새 따라 햇살이 깊게 내려와 아직은 온기가 느껴진다. 칼바람이 되기 전, 아량을 베풀 듯 바람도 아직은 버틸 만하다. 그러다 커다란 바람이 고갯길을 훑고 가더니 나무들이 여기저기서 휘청휘청 몸을 흔들며 휑한 휘파람 소리를 불어댄다. 새들의 날개 치는 소리까지 들리면 작은 공포로 순간 속이 쪼그라들기도 한다. 발걸음을 재촉하니 어느새 시야에 뻥 뚫린 하늘이 들어온다. 쉽게 하늘재 정상에 다다랐다. 이대로 내려가면 경상도 문경으로 진입한다. 잦아드는 산세 앞으로 하늘이 가득 펼쳐지고 느릿느릿 구름이 흰 붓질을 해댄다. 찰나를 놓칠 때마다 하늘은 새로운 그림을 선보인다. 1800년을 간직한 순한 길에 무위의 공간이 덧대어진다. 2세기 신라인이 바라보았을 풍경 앞에 내가 서 있다. 신라는 백두대간 고개를 개척해야 남한강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가장 오래된 옛길, 하늘재를 156년에 개척했다. 고려 말, 문경새재가 생기기 전까지 경상도와 서울을 잇는 기점이었고 이 길을 따라 물자와 군사, 사람들이 오갔다. 이 고갯길 초입에 고려시대 번화가였던 커다란 유적지가 있다. 경상도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중생들에게 쉼과 안위를 주었던 곳, 미륵대원이다.
통일신라시대 석굴사원인 ‘석굴암’을 빼면 돌로 된 고대 공간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지만,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에 오면 돌덩이만 가득한 공간에 놓인다. 화재와 전쟁으로 둔탁해졌어도 돌이 갖는 특유의 강인함은 빛바래지 않는다. 하늘재를 넘어온 사람들은 남한강으로 가기 전, 미륵대원에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고 잠을 청했으며 서로 상업적 정보도 교류했다. 신라 말 국가의 공식적인 역제가 붕괴되자 사찰에서 만든 원(院. 국영여관)이 그 기능을 대신하면서 여행자나 상인에게 숙박과 휴식, 식사 등을 제공했다. 고려시대 때 원은 크게 성해 사찰에서 직접 운영했고 간선도로에서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 주로 설치되었다. 미륵대원도 미륵대불이 있는 지금의 자리와 그 옆, 하늘재로 넘어가는 곳에 대형 숙박시설이 있다. 발굴조사 결과 ‘回’자 형으로 지금도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작은 백화점 한 층 면적 정도 되는, 당시로서는 큰 규모로 중정은 말들을 묶어두는 장소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 하늘재는 156년 신라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문경 쪽 모습

미륵대원의 미륵대불(보물 제96호). 자비롭고 온화한 모습으로 천 년 전에도 숱하고도 얄궂은 고비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넸을 것이다.

입구에 서면 다른 폐사지에서 볼 수 없는 신비로움이 엄습한다. 차분히 가라앉은 석축과 기단이 보이고 미륵대불(보물 제96호)과 오층석탑(보물 제95호), 그리고 돌거북, 석등, 보주탑 등 돌 유적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미륵대원은 뒷산의 물길을 인공적으로 끌고 와 그 좌우에서 원과 동원을 배치했다. 이 사찰은 우리나라에서 남을 등지고 북을 향해있는 유일한 곳이다. 남쪽으로 월악산의 산맥이 이어지고 북쪽으로 충주지방으로 잦아드는 산세가 보인다. 미륵대원은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가 고려에 항복한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하고 금강산으로 향하는 중간에 세웠다는 설과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염원으로 지었다는 설이 있다.
미륵불을 향해 나아갔다. 미륵대불은 ‘ㄷ’자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는 석굴사원과 목조건축이 혼합된 반석굴 사원이기 때문이다. 허리까지 방형의 석굴을 만들고 그 위로 목조건물을 올렸는데 목조기둥의 초석들이 주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삼면의 석벽 돌들은 여러 곳이 깨지고 둔탁해져 있다. 원래는 정교하게 다듬은 돌들로 위아래 감실(불상이나 신위, 성체 등을 모셔둔 작은 공간)을 두었고 판석에 보살이나 불좌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깨지고 상처 입은 돌들이 버텨온 세월을 붙잡으며 미륵 주변을 감싼다. 석축의 이끼들은 이미 무늬가 되었고 풍화된 돌멩이들은 감실을 채운다. 그래도 미륵의 자비로운 미소는 숱하고도 얄궂은 고비를 지나온 중생에게 지금도 커다란 의지가 되어 준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월악산 송계계곡을 거슬러 고려시대 탑인 ‘사자빈신사지석탑’에 들렀다.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처럼 네 모서리에 사자가 한 마리씩 배치된 독특한 석탑이다. 사자는 사방을 경계하듯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그 가운데 비로자나불상이 앉아있다. 그는 두건을 썼고 엄한 표정으로 사자의 호위를 받으며 탑신을 떠받고 있다. 탑 하층기단 정면에는 고려 현종 13년(1022)에 ‘몹쓸 적들이 아주 물러갈’것을 기원해 사자빈신사에 구층석탑을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했던 때였다. 마을 구석진 곳에 홀로 위풍당당 서서 중생처럼 탑의 무게를 견뎌낸다.
돌아오는 길, 월악산이 내 옆 가까이에 붙어 따라온다. 자연은 역사의 흔적을 늘, 제 몫대로 살면서 버리지 않고 숨겨놓는다. 인간은 대지 위에 자취를 남기며 죽지 않고 역사를 만든다. 남한강을 건너며, 미륵대불과 비로자나불의 위로를 받으며,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돌에 글을 새겨 흔적을 남기면서. 중원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고려, 조선 등 다양한 층의 시대적 서사 속에 빠져들었다. 역사도시 충주. 아직 볼 것 들이 많아 아쉬운 발걸음이다.

사자빈신사지석탑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처럼 네모서리에 사자가 한 마리씩 배치된, 독특한 고려시대석탑이다. 사자의 호위를 받는 비로나자불의 모습이 보인다.

미륵대원의 모습. 1970년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대원사’라는 이름이 발견되어 ‘미륵대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사찰은 북을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