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이야기

2019 여섯번째 이야기

vol.110

Prologue

FSS가 만난 사람

예순 세 명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은 엄마 홀트아동복지회 김옥순 위탁모

글. 홍유진 사진. 김진호

부모 됨의 무거움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아이에게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만들어주는 것. 남들은 한 번으로도 충분히 버거워할 만한 ‘부모 되기’를 무려 예순세 번이나 해낸 사람. 김옥순 씨의 포근하고 따뜻한 내면에서 우리는 포용의 참 의미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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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외롭게 태어난 아이에게 따뜻한 가정을 선물하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귀여운 파마머리를 한 민혁(가명)이는 올해 다섯 살이다. 엄마 손을 꼭 붙들고 아장아장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여느 아이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낯선 어른들이 건네는 인사에도 낯가림 없이 배꼽인사를 하는 모양이 제법 의젓하기까지 하다. 민혁이가 조금 특별한 이유, 아니 소중한 이유는 위탁모 김옥순 씨가 63번째로 맞이한 귀한 자식이자,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저는 아기가 양부모를 만나 정식 입양을 갈 때까지 아이를 책임지고 돌보는 위탁모입니다. 1992년에 처음 시작했으니 벌써 26년째 위탁모 일을 하고 있네요. 그동안 제가 입양 보낸 아이들만 해도 60명이 훌쩍 넘어요.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2년씩 돌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민혁이처럼 이렇게 오래도록 양부모를 찾지 못한 경우는 처음이라 요즘 얼마나 걱정이 많은지 몰라요.” 보건복지부 입양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법원에서 허가받은 국내외 입양아동은 681명으로 전년보다 21.0%(182명) 줄었다.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면서 출생 일주일 이후 입양 동의가 이뤄지는 입양숙려제, 가정법원허가제 등이 도입되었고, 입양아동 수는 2013년 922명, 2014년 1172명, 2015년 1057명, 2016년 880명, 2017년 863명으로 꾸준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입양 절차가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입양 기간이 길어질수록 민혁이의 사례처럼 입양처를 찾지 못한 채 위탁모의 보호 아래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아무래도 국내 양부모님들은 조건을 까다롭게 보시는 편이죠. 당연히 어떤 장애도 없어야 하고, 친생부모가 어떤 이들이었는지 유심히 보시는 분들도 있고, 남아보다는 여아가, 나이가 어릴수록 입양이 잘 되는 편이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민혁이 같은 경우에는 그런 조건에 부합하지 않아서 이렇게 위탁 기간이 길어지는 거고요.” 우리나라 입양의 역사는 1955년 한국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려 8명의 전쟁 고아를 입양한 미국 홀트부부의 선행이 그 시작이다. 덕분에 미국에서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기위해 입양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한때는 세계 최대의 ‘고아수출국’이라는 부끄러운 별명도 얻었지만 약 10여 년 전부터 국내입양이 국외입양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2008년 이전까지 3대7 수준이었던 국내입양과 국외입양 비율은 2009년부터 국내입양이 국외입양을 웃돌기 시작해 지난해에도 국내입양 아동이 378명(55.5%), 국외입양 아동이 303명(44.5%)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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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정성으로 돌본 아이들이 가르쳐준 참 행복의 의미

홀트아동복지회 본부에는 약 150여 명의 위탁모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김옥순 씨는 조금 특별하다. 위탁모 일을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들을 돌봐온 책임감뿐만 아니라 아무리 아픈 아이라도 끝끝내 건강하게 보살펴서 입양시켜 온 사명감으로 유명한 베테랑 위탁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를 거쳐 간 63명의 입양아들 가운데 33명이 장애가 있거나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었고, 그들 모두 입양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김옥순 씨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자부심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입양의 날 행사에서 김옥순씨는 국무총리 표창을 받기도 했다. “말할 수 없이 기뻤죠. 단순히 상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지금껏 열심히 일해 온 보람이 있구나.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구나, 라는 것을 인정받은 기분이었거든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큰 자부심은 그녀를 “엄마”라고 불러줬던 63명의 아이들이다. 초창기에 위탁했던 아이들은 이제 모두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 김옥순 씨를 찾아와 눈물겨운 인사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일 년 정도 맡았던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돌 되기 전이라 기어 다니는데 어느 날 이 아이가 뜨거운 김을 뿜어대는 밥통 뚜껑을 실수로 짚은 거죠. 깜짝 놀라 헐레벌떡 응급실로 데려갔지만 화상이 흉터로 남고 말았어요. 최근에 그 아이가 친모를 찾으러 한국 방문을 했더라고요. 안타깝게도 친모와는 만나지 못하고 저와 연락이 닿았는데, 그 화상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태어난 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은 신생아부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돌쟁이 아기까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씩 소요되는 육아의 과정은 매일 매일이 전쟁과도 같다. 건강한 아이도 갑자기 열이 오르거나 사고가 나기일쑤인데, 아픈 아이들은 오죽할까. 밤잠도 제대로 자지못하고, 내내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다가 여차하면 응급실로 뛰어간 적도 여러 번이다. 수십 년의 정성과 희생이 모여 연약한 아이에게 건강을, 한 가족에게는 눈부신 축복을 전달할 수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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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끌어안는 엄마의 깊은 품

그녀가 이렇게 위탁모 일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건 가족들의 따뜻한 응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처음 위탁모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김옥순 씨의 두 자녀는 아직 십대에 불과해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고 한다. “매일 새벽 3시면 일어나 아이들 준비물 다 챙겨놓고, 아침 준비를 했답니다. 처음엔 조금 불만을 가지는 것 같았던 아이들도 차츰 어린 동생들을 챙기는 일을 익숙하게 생각하더라고요. 딸아이가 지금은 결혼해서 애가 셋인데, 애들 옷을 살 때마다 몇 벌씩 더 사서 동생들 입히라고 보내주곤 해요. 같이 돌보는 거나 마찬가지죠.” 은퇴한 남편은 현재 공동육아나 다름없을 정도로 위탁가정의 일원으로서 할 몫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민혁이는 저보다 아빠를 더 잘 따른다니까요” 하고 덧붙이며 그녀는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재미있는 건 실제 자녀들이 결혼을 할 때부터 못박아 두었다는 그녀의 다짐이었다. “너희들 애는 못 봐준다. 베이비시터를 쓰든지, 알아서 키워라. 딱 못을 박았어요. 제 품은 엄마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열려있는 거지, 멀쩡한 엄마가 있는데 왜 내가 키워주느냐고요. 기특하게도 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손주들을 내게 부탁한 적이 없어요. 같이 육아를 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동료 같은 관계가 됐답니다.” 아직도 아이 옷을 손빨래로 빨아 입히느라 여기저기 관절염도 생기고 아픈 곳도 많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위탁모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김옥순 씨. 그녀에게는 그 수 많은 아이들이 한 명 한 명 다 기억에 남는다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다. “입양특례법이 생기면서 입양 보내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 전에는 몇 달이면 됐는데, 이제는 2년, 3년씩 걸린다고. 아이들은 금방 크기 때문에 때를 놓치면 입양 보내기가 힘들어요. 아주 안타까워 죽겠어요. 얼른 좋은 가정 찾아서 나갈 수 있게 좀 풀어주든지, 아니면 책임지고 아이들을 키워낼 수 있는 시설이라도 지어줬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도중에도 그녀는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수없이 많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걱정하고, 헤어지는 세월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맡겨진 아이들을 그 깊은 품속에 끌어안는다. 위탁모 김옥순씨의 위대한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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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트아동복지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설립자인 해리 홀트가 부인과 함께 여덟 명의 전쟁고아를 입양한 데서 시작된 홀트아동복지회는 그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아동 복지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지원해 오고 있다..